겡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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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 영암삼호조선소달맞이쌀연맹왕국(왜국 자치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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겡청 전쟁(坑淸戰爭)은 2051년 청주미소년공국이 겡상민국을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대한게임국 영토의 절반 가량이 폐허가 되었으며, 청주미소년공국은 겡상민국,천안연합국,서울화학공화국 3국의 신탁통치를 받았다.
차례 |
[편집] 청주미소년공국의 천안연합국 침공
이 부분의 본문은 천안삼거리호두과자병천순대연합국#역사#청주미소년공국과의 전쟁입니다.
천안연합국의 여당인 닫힌너희당의 일부 동인녀 당원들이 BL을 즐기자 이에 격분한 조순형 총재가 BL금지령을 내렸고, 동인녀 당원들은 탈당하여 청주미소년공국으로 망명하였다. 동인녀들은 미소년 대공에게 천안연합국이 변변한 군사조직 하나 없는데다 국가 차원에서 BL을 탄압한다는 구실로 전쟁을 부추겼다. 마침 서울화학공화국과 전라민국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천안연합국의 지리적 이점에 눈독을 들여 침공 시기만 저울질하고 있던 미소년 대공은 이때다 싶어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어 천안연합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때가 2050년 6월 25일 새벽 4시였다.
청주미소년공국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선전포고에 당황한 조순형 총재는 황급히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으나, 무력이라고는 일절 없었던 탓에 미소년군은 사실상 천안에 무혈 입성하였고, 개전 3일만에 천안연합국 전체를 점령하였다.
이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절감한 조병옥 박사(조순형 총재의 부친이자 당시 대통령)는 황급히 주변 국가들에게 파병 요청을 하였으나 서울화학공화국과 수원생물공국은 중립을 내세워 애써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겡상민국은 이미 청주미소년공국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 불가침 조약의 내용은 완전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대략 청주미소년공국이 겡상민국의 땅을 쳐들어가지 않는 것과, 겡상민국의 영동, 옥천, 충주 점령 등을 묵인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탐라공화국은 참전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그 대가로 대신 조병옥과 조순형의 퇴임을 요구하였고, 천안연합국은 싫어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병옥의 후임으로 크세디우스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신임 대통령 크세디우스는 수원생물공국에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부통령으로 유세비우스를 임명하였고,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탐라공화국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한편, 탐라공화국의 수송제1함대가 아산에 도착하였고, 해병대 1여단이 천안에 주둔 중인 미소년군 대본영을 야습하려고 하였으나 BL장면에 혹해서 보기좋게 떡실신당하고 말았다(참고로 탐라공화국에는 육군이 없었다).
미소년군은 천안연합국 임시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북상하여 수원생물공국을 침공하였다. 미소년군이 오산,병점 청년들에게 자행한 BL행각에 경악하여 생물 대공은 천안연합국에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천안연합국 게릴라군은 수원생물공화국 정규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였다.
이후 천안연합국의 수도는 미소년군 대본영과 수도방위 제 1사단, 경기남도는 미소년군 3사단이 점령하였다.
[편집] 겡상민국 침공
[편집] 발발
한편 겡상민국의 국민들 대다수가 미소녀들로 구성되어 있음에 상당히 불쾌해했던 미소년 대공은 BL행각에 방해가 되는 미소녀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2051년 1월 4일 불가침 조약을 깨고 전국 총 동원령을 내려 겡상민국의 상주삼백쌀곶감명주공국과 김천을 침공하였다.
청주미소년공국 측의 침공 작전은 이렇다. 1사단은 추풍령을 넘어 김천,구미,칠곡을 점령하고, 2사단은 속리산을 넘어 상주삼백쌀곶감명주공국,안동,의성을 점령하여 대구페놀공화국에서 합류하여 부산미소녀공화국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소년군 3,4군단이 먼저 대전카이스트시국과, 전라민국의 전주물리공화국, 광주인권공국을 함락시킨뒤, 겡상민국 서부의 진주와 마산으로 진격하여 부산미소녀공화국을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남해 바닷물을 끌어들여 부산미소녀공화국을 수장시킬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 전쟁 초기부터 겡상 민국 침략계획을 세웠던 청주미소년공국 측과는 달리 겡상민국은 팕정이 왕의 축출 이후 임시정부가 들어서는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라 불가침 조약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겡상민국군 총사령관인 샤나를 비롯해서 참모들이 청주미소년공국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고 간청하였지만 당시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권영길은 혼란 수습을 이유로 이들의 의견을 반려하였다.
결국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주삼백쌀곶감명주공국과 김천이 점령당했다. 이 때 175만명의 민간인이 김밥 공습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교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편집] 상주 전투
대부분의 시민들이 스파르탄이었던 상주삼백쌀곶감명주공국에서는 미소년군이 레오니다스 왕의 휘하 300명의 민병대원들이 "This is SpartAAAAAAAA!!!!!"를 내세워 미소년군을 마구 도륙하였다. 미소년군이 BL행각을 하는 것을 보고 빡돌아서 이들을 낭떠러지로 내몰아 낙동강물에 수장시켰다고 하였다. 투하한 김밥까지 주워먹으면서 미소년군 보병 1개 연대를 거의 순식간에 관광시켜버린 것에 경악한 2사단 사령부는 보병들을 문경으로 후퇴시키는 한편 포병의 화력으로 겨우 민병대 전원을 떡실신시켰다고 한다.
결국 민병대를 끝으로 상주삼백쌀곶감명주공국는 거의 궤멸되었다.
[편집] 지오챙 함락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겡북지방과는 달리, 오랫동안 겡남지역은 미소년군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팕정이, 권영길의 시대에 그나마 청주미소년공국에 대한 방어준비가 겡남지역에는 전혀 없다시피 하였다. 게다가 이 상황은 미소년군이 대전카이스트시국, 전주물리공화국마저 함락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에따라 미소년군 3군단 휘하의 6,7사단이 지오챙으로 거의 쏟아져 들어오다시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지오챙은 청주미소년공국에게 있어 있으나마나한 땅이었다. 왜냐하면 자원도 인구도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오챙은 겡상민국에서 가장 후방에 있어 안전하다고 외국인들에게 까지 소문난 곳이었다. 이러한 지오챙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토의 상실을 넘어 겡상민국의 국가신인도에도 큰 치명타를 주기에 충분하였다. 또 지오챙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기도 하였는데, 지오챙이 함락된다면 무방비 상태인 밀양까지 내주게 되어 대구페놀공화국을 남쪽으로도 포위하게 된다.
미소년군 6사단은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7사단은 장수군에서 각각 진격하였다. 처음에 미소년군은 단 4시간만에 지오챙 군청을 점령하는 등 지오챙 함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지오챙 주민들은 지리산 기슭이라는 지형적 조건을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미소년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며 약 3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미소년 대공이 직접 작전을 바꾸어 숲과 민가를 불태우며 조금씩 진격하는 방식으로 바꾸자 게릴라전도 소용없게 되었다. 게다가 이 작전으로 인해 게릴라로 오인된 많은 지오챙 주민들이 학살돠었으며, 이들중엔 외국인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지오챙은 완전히 함락되었고, 합천군과 산청군을 포함한 많은 지역을 내주게 되었다.
[편집] 북부지역 점령과 반격의 준비
이 부분의 본문은 싯다르타 고타마입니다.
상주 전투 이후로 미소년군 1사단과 2사단은 빠른 속도로 대구페놀공화국으로 향했으며,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겡상민국군이 겨우 조직되어 첫번째 임무수행에 돌입할 당시 미소년군 1사단은 구미를 넘어 약목까지 와 있었으며, 2사단은 군위를 점령하고 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1사단의 경우 낙동강을 도하할 장비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약목에서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와중에 권영길이 괴한에 의해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임시정부의 모든 권한을 군 총사령관인 샤나에게 위임하였다. 샤나는 총동원령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서둘러서 3개 사단으로 편제를 조직하고 대구페놀공화국에 급파시켰다.
병력의 대부분이 기초군사훈련밖에 받지 못한 오합지졸인데다 절대다수가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미소녀들이라 샤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2사단이 주둔 중인 파계사에서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불공을 드리는 도중 우연히 싯다르타 고타마의 눈에 띄게 되었고, 한눈에 대선사임을 알아본 샤나는 울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겡상민국을 구원해 달라고 읍소하자 싯다르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붙여 수락하였다.
1. 佛陀和事實,我不通知的敵人。(내가 싯다르타란 사실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2. 我發誓保護他們的人權的嚮導。(마법사들의 인권을 존중해라.) 3. 不要殺死僧侶和囚犯進行閹割。(포로들은 죽이지 말고 거세해서 승려로 보내라.) 4. 拂敎傳敎活動,積極與他合作。(불교 포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라.) 5. 在戰利品的十分之一的救濟金。(전리품 중 10분의 1은 시주하라.)
[편집] 낙동강 전투
이종족들로 구성된 겡상민국 미소녀군 3사단은 왜관에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미소년군 1사단과 조우하였다. 미소녀군 3사단은 미소년군의 도하에 대비하여 철교 옆 야산에 (궁술에 특화된) 엘프 연대를 매복시키고, 나머지 이종족들과 포병대대는 철교를 폭파하고 왜관읍내에 배수진을 치는 형태로 미소년군이 도하하기만을 기다렸다.
다음날 새벽을 기해 미소년군이 도하하자 즉시 반격에 들어갔다. 전면에 배치된 이종족 2개 연대가 도하해오는 미소년군을 제압하고, 엘프 연대는 도하중인 미소년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포병대대는 먼저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미소년군 지휘소를 정밀 타격한 뒤 부교에 박격포를 집중 투하하여 아예 수장시켰다.
구미까지 무혈 입성해오던 미소년군 1사단은 갑작스러운 미소녀군의 공격에 당황해 하며 2개 연대가 넘는 병력을 잃고 구미로 퇴각하였다. 이는 겡청 전쟁에서 겡상민국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다.
[편집] 다부동 전투
겡상민국 미소녀군 1사단과 2사단은 황학산(1사단)과 가산산성(2사단)에 진지를 구축하고 미소년군 2사단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1사단과 2사단은 100% 보병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3사단처럼 포병의 화력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미소녀군 1사단과 2사단은 미소년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미소년군의 보병연대는 혈투 끝에 제압하는데 성공했으나 기계화대대와 전차대대를 상대로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미소녀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퇴각하여 3사단에 합류하였다.
[편집] 영천 대회전
미소년군은 비록 낙동강 및 다부동 전투에서 지체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파죽지세와 같은 속도로 겡상민국을 유린하고 있었다. 이에 미소년군 제 15사단은 대구페놀공화국 서북부인 영천을 포위하기 이른다. 영천을 수비하고 있었던 미소녀군 제 8사단은 미소년군 제 15사단이 보급로가 길다는 점을 이용 하기로 하였다. 당시 15사단의 주 보급로는 왜관-영천에 이르는 선이었는데, 미소년군의 작전은 왜관과 영천을 가각 점령하여 대구페놀공화국을 포위, 점령하는 것이었다. 당시 300만이었던 대구의 인구는 피난민으로인해 700만에 달하였고, 2051년 9월 7일에는 대구 시내에 57발의 포탄이 떨어져 800명이 넘는 시민이 사망하는 등의 혼란 상태였다. 이런 대구를 잃게 된다면 지오챙과 진주가 청주미소년공국군에게 함락된 상황에서 남은 곳은 부산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소년군 15사단은 긴 보급로와 전투의 피로로 인해 사기가 떨어지게 되었고 미소녀군 제 8사단의 포위 게릴라 전에 의해 전멸은 아니지만 상당한 피해를 잃게 되었고, 한때 영천의 80%를 점령하였지만 곧 영천에서 퇴각하게 된다. 이는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칠곡 전투의 시간을 벌어주게 된다.
[편집] 칠곡 전투
다부동에서의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샤나와 싯다르타 고타마는 태전동(여기가 뚫리면 대구페놀공화국이 함락된다)에 배수진을 치고 동명면에서 진지구축 중인 미소년군 기갑여단에게 "不想去幺??"라는 내용의 텔레파시를 전송하여 칠곡으로 유인하게 하였다. 대선사의 뜻대로 칠곡 한복판에 기동중임을 노려 원기옥을 발동하였다.
주위가 산지인 탓에 미소년군의 기갑여단은 꼼짝없이 원기옥을 맞고 전멸하였으며, 1사단의 패전에 이어 2사단마저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청주미소년공국 대본영은 결국 대구페놀공화국 점령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편집] 아산상륙작전
한편, 경기남도를 점령하고 있던 미소년군 3사단은 수원생물공국과 천안연합국 게릴라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 3사단 사령부에서 제작한 BL 비디오가 서울화학공화국에까지 퍼지게 되자 청주미소년공국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의회에서도 만장일치로 선전포고안을 가결하였다. 결국 오세훈 주석은 제독 티안무가 이끄는 겡상민국의 자랑 무적함대, 수원생물공국군, 천안연합국 게릴라들과 연합하여 티안무의 지휘 하에 아산만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겡상민국과의 전쟁에만 몰두하느라 점령지 천안연합국과 북부전선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안 쓴 상태에서 서울화학공화국이 선전포고를 해 오자 청주미소년공국의 대본영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서울화학공화국군의 전격전으로 인해 아산 상륙 작전은 성공리에 종료되고, 아산 루트를 통해 천안연합국이 해방되고 사면초가의 미소년군은 허리가 끊긴 상황에서 보급선 탈환에만 매달리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편집] 종전
천안을 탈환한 연합군은 조치원에서 미소년군 3사단과 5사단의 저항을 받았으나 물자 부족과 연이은 패전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인해 이내 항복하였다. 반면 겡상민국 미소녀군은 대전에서 퇴각 중이던 미소년군 1사단을 섬멸하고 대전카이스트시국을 탈환하였다.
결국 연합군과 미소녀군은 청주에 입성하였고, 양군은 무심천에서 조우하였다. 오세훈 주석과 샤나 총사령관은 즉석에서 회담을 열어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하였다. 양국 정상은 천안연합국과 대전카이스트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으며, 청주미소년공국의 영토는 무심천을 기준으로 서쪽은 천안연합국, 동쪽은 겡상민국이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미 대본영은 공중분해되었으며, 미소년 대공은 대판으로 망명하여 사실상 청주미소년공국은 멸망하였다.
[편집] 전후
[편집] 정치적 변화
전쟁 이후 대한게임국에서는 청주미소년공국이 멸망한 대신에 천안연합국이 재건되었고, 대전카이스트시국이 건국되었다. 청주미소년공국의 옛 영토는 서울화학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천안연합국과 겡상민국이 신탁통치를 하고 있으며, 2200년에 충청민국연방의 출범에 맞추어 새로 건국될 청주미소년공국에 반환될 예정이다.
겡상민국의 경우 임시정부가 해체되고 부산미소녀공화국, 대구페놀공화국에 이어 새로운 자치국 다수로 구성된 겡상민국연방이 출범하였고, 연방대통령으로 권영길 임시정부 수반이 취임하였다. 뒤이어 열린 부산미소녀공화국의 초대 최모토 대선에서 총사령관이었던 샤나가 낙선한 반면 3사단장을 지냈던 스이세이세키 후보가 대통령에, 2사단장을 지냈던 사와치카 에리 후보가 총리에 올라 준(準)군사정권이 출범하였다. 대구페놀공화국에서는 조커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상주삼백쌀곶감명주공국에서는 레오니다스 대공이 대공자리를 물려받았다.
[편집] 전쟁이 가져다준 피해
천안연합국과 청주미소년공국의 정치적 갈등에서 빚어진 겡청 전쟁은 청주미소년공국은 400만명, 겡상민국은 무려 1800만명(군인/민간인 포함)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청주미소년공국 전역과 겡상민국 북부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편집] 도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