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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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 전쟁
장소 : 경기남도 중서부
결과 : 수원생물공국의왕지역 획득, 수원지역 식수공급 자율화 조치, 에니앙 시티의 경제 몰락.
교전국
수원생물공국 에니앙 시티

물병 전쟁은 1976년 수원생물공국에니앙 시티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후일 경기남도 일대에서 벌어진 청주미소년공국의 침략 양상 또한(겡청 전쟁처청 전쟁 참조)이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

차례

[편집] 개요

물병 전쟁은 후일 청주미소년공국에 의해 일어난 전쟁들-겡청 전쟁처청 전쟁-과는 달리 이데올로기 전쟁이 아니다. 다분히 경제전쟁으로 사학자들 사이에 분류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경기남도에 있는 공화국 및 공국들은 모두 경기도 사투리를 쓰는 등 문화적으로 매우 큰 유사성을 띈다.
  • 제2차 한국전쟁이후 모든 연방국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며, 이는 각 공화국들의 단결력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했다.
  • 1960년대 서울화학공화국인천기독공화국의 무분별한 확장은 주변 공화국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제2차 한국전쟁이후 대한게임국 내 연방국 들중 가장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경기남도 일대의 소국들은 이촌향도의 영향으로 빈민들이 몰려들어 슬럼화 등 각종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기 쉬웠다. 더군다나 자원이 풍부한 강원도 및 겡상민국과는 달리, 경기남도의 산업은 오직 농업뿐인것도 문제였다. 이 상황에서 당시 중개무역과 생수판매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에니앙 시티에서 생수를 무기로 주변 국가들에게 횡포를 부리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물병 전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물병 전쟁의 단초가 되었던 수원생물공국과 에니앙 시티 사이에 1955년에 맺어진 지지대 조약은 아직까지 모든 내용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에니앙 시티가 싼 값에 수원생물공국으로부터 물을 공급하고 서울화학공화국과의 무역로를 터주는 대신에 수원생물공국 내 관개시설 건설을 금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편집] 개전

원래 수원생물공국 무역의 대부분은 서울화학공화국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지정학적으로 서울화학공화국과 수원생물공국 사이에 있던 에니앙 시티가 많은 이익을 거둘수 있었다. 또한 1955년에 체결한 지지대 조약으로 인해 수원생물공국의 상수도 문제는 전적으로 에니앙 시티가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이익 또한 대부분 에니앙 시티가 가져갔다. 하지만 에니앙 시티 정부가 이를 악용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수원의 인구는 지지대 조약 이후 매년 평균 16%씩 성장하였으며 1975년 경에는 인구가 이미 지지대 조약 때의 10배를 상회하는데도 조약에 막혀 물 공급에 지장을 받았다. 1976년 경에는 상황이 매우 열악해 하루에 단 3시간만 물을 공급받을수 있었으며 샤워는 죄악으로 간주 될 정도였다. 1976년 3월 22일 물의 날에는 수원역 앞에 100만명이 넘는 수원생물공국인들이 집결하여 생존권과 식수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정도였다. 다음날 수원생물공국 정부는 이에 굴복해 한정수량으로 에니앙 생수 4000t을 수원역 내 AK플라자에 내놓았고 이는 엄청난 사재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물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국 내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게 되었다. 4월 춘궁기와 시민들의 분노를 앞두고 수원생물공국 정부는 에니앙 시티 몰래 광교저수지를 건설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에니앙 시티 측은 계약위반이라며 1976년 6월 수원천 및 황구지천의 물길을 막아버렸다. 식수부족으로 인한 치안공백 및 인플레이션 현상은 1967년 한여름에 절정에 달했으며 이때 에니앙 시티는 경기도 내 다른 국가들의 비난을 받은 끝에 7월 31일에 수원천과 황구지천의 물길을 복원하였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통보하지를 않아 더위를 피해 말라붙은 강가에 쉬고 있었던 수원생물공국인 6명이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태를 계기로 수원생물공국측은 사과를 요구하였고, 에니앙 시티는 사과는 하지만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상황이 폭풍전야 같던 1976년 8월 17일, 이 날은 대한게임국의 독립열사중 한 분이셧던 장준하 선생의 1주기 되던 날이었고 에니앙 시티 측은 서울화학공화국도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당시 에니앙 시티는 아직 프랑스의 영향아래에 있었다) 이 때 에니앙시티를 휩쓴 민족주의의 광풍은 엉뚱하게 서울화학공화국의 피보호국이었던 수원생물공국에 불똥이 튀게 되었다.

1976년 9월 8일 새벽 에니앙 시티의 청년들은 광교저수지 건설 반대 및 장준하 선생 죽음에 대한 책임 통감 등을 들며 지지대 고개서부터 석궁관대학교까지 행진을 하였다. 그들은 또한 각종 테러행위를 일삼게 되었고 수원생물공국 측은 진압과 동시에 개전을 선포하였다. 물병전쟁의 시작이었다.

[편집] 초기

개전 초기에는 양 군의 전력은 비슷하였다. 에니앙 시티는 프랑스로부터 지원받은 장비가 충분하였고, 수원생물공국은 그간에 전쟁준비를 착실히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전선은 1977년 봄이 올때 까지 의왕역 주변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76년 겨울 3개월(11, 12, 1월)동안 의왕역은 300변 이상 주인이 바뀌었으며 이 주변에 엄청난 양의 김밥에 투하되었다. 철도박물관 또한 폐허가 되었지만 전시된 물품들은 모두 안양역 일대로 옮겼다.

전선이 교착화되자 생물 대공은 광교산과 백운산을 돌아서 포일, 내손동을 점령함으로서 에니앙 시티를 동쪽에서 치자고 하였으나 겨울이라는 점과, 경계가 삼엄하다는 점에서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점에 곧 폐기되었다.

[편집] 중기

[편집] 후기

[편집]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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