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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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제(趙粒霽, 기원전
년 ~
년)는 조선의 수학자이자 백괴학자, 화성인 신봉자이다. 조립제의 연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고차식에 대한 인수 분해 알고리즘의 일종인 조립제법이다.
차례 |
[편집] 어린 시절
조립제는 기원전
년 평양에서 조광조의 서자로 태어났다. 조립제의 가문은 본래 유서 깊은 연예인 집안 겸 재벌로, 그의 아버지는 당시 첫 데뷔작인 '유림의 숲'의 히트로 조선에 일명 오빠 부대를 형성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으나,
세기 초반 기묘사화를 피해 평안도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조립제가 태어나기 전, 조광조는 명박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 바가 있다. 하지만 팬들의 강력한 후원으로 가정 경제는 괜찮았고 조립제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조립제는 어려서부터 수리적 감각이 뛰어나, 그의 나이
살 때 당시 조선 임금이었던 중종 앞에서
일 때
이 3 이상의 자연수이면 이를 만족시키는 자연수
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백이 부족한 정리를 이용해 증명해 보였다.
년 듕귁의 국자감이 개교되자 조립제는 국자감 성리학부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성리학부의 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어떻니 하는 잼과 실용성이 0에 수렴하는 것들만을 연구했기 때문에 조립제는 국자감에서의 생활이 매우 즐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페르마가 '1=2라는 것을 여백 살 돈이 없어서 증명을 못하겠다. 대신 증명 좀 해 달라'는 편지를 조립제에게 보내고부터 둘 사이의 학문적인 교류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조립제는 페르마의 추천으로 언사이클로버서티 수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편집] 조립제법
조립제는 박사 과정을 프랭크 ㅈ. 코넌드(Prank J. Conundr) 교수의 연구실에서 보냈는데, 그의 연구 과제는 인류학 및 심리학과 수론의 초근원적 연계성에 대한 것이었다. 코넌드 교수의 목표는 이 연구를 통해서 화성인의 인류학적 실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코넌드 교수의 연구실은 수많은 고차 다항식의 인수 분해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작업은 대입 또는 직관력에 의존하는 방법뿐이었다.
연구에 참여하던 조립제는 이 과정을 간소화하기 위해 고민한 끝에 나머지 정리를 응용한 알고리즘을 개발하였다. 조립제는 이 새로운 알고리즘의 효율성에 매료된 코넌드 교수의 권고에 따라 이 정리를 1938년 A Study of Polynomial Equation이라는 제목으로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1]에 기고하였다. 발표 당시에서는 이 알고리즘에 대한 이름이 없었는데,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조립제 메서드(Cho Ripje Method)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루피니는 조립제법이 유일한 해를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 방법은 다항식
을 이항식
으로 나누어 몫이 되는 다항식
과 나머지를 얻는다.
조립제법은 미국 중등 수학 교육 과정에 Cho Ripje Method(나중에 synthetic division으로 개명됨)라는 이름으로 소개됨으로써 곧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당시 조선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었다.[2]
[편집] 정권과의 불화
광복 직후 귀국한 조립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최초로 수학과를 개설하였다. 하지만 아버지 조중응의 친일 행각과 이념 문제로 인해 미국으로 영구 망명하게 된다. 이후 1961년 5·16 정변이 일어나자 조립제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여 한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박정희 정부는 조중응의 친일 행각과 김일성종합대학 경력을 근거로 하여 조립제를 반체제 인사로 분류, 입국을 금지하였다.[3] (조립제의 일가는 한국 전쟁 당시 모두 월남한 상태였다.)
분노한 조립제는 미주를 중심으로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곧 정권의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조립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으며, 심지어 유신 시기에 있었던 교육 과정 개편에서 중등 수학 교과 과정에서 조립제법을 삭제하기까지 하였다.
이 조치는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 벌어진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야 시정되었다.
[편집] 조립제법 파동
일부 교사들은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조립제법이 인수 분해 시간을 줄여 주므로 대입 시험에서 고득점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조립제법을 불법적으로 비밀리에 가르쳤다. 이에 박정희는 긴급 조치 18호 극악무도한반민족반국가반정부반유신친북좌익사범조립제및그심정적동조자일체의영구정화를통한국가안전과공공질서도모를위한대통령긴급조치(일명 조립제조치)를 발동하여 전국 중등 수학 교사 18명 및 대학생 28명(과외를 하면서 몰래 조립제법을 가르쳤다)을 구속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제1차 조립제법 파동, 1978) [4] 다음해 2월 31일, 해직된 교사와 학생들의 복직, 복학 허용을 촉구하는 부산 경남 지역 대학 교수들의 성명서가 발표되는 과정에서 정부 측이 고용한 폭력배들이 개입하면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다. (제2차 조립제법 파동) 이 날 성명서 발표를 주도한 부산대학교 어묵공학과 교수 김병삼이 둔기에 의해 후두부를 강타당하여 식물 인간이 되었다.
김병삼 교수의 비극을 포함한 이러한 사건의 경과는 당시 언론에 중점적으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부산, 경남 지역의 민심은 크게 흉흉해졌다. 왜냐하면 김병삼은 부산 경남 지역 오뎅 상인 협회 고문으로 일하면서 지역 경제 활성화에 한몫하던 중형급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때마침 김병삼의 사촌 동생이었던 정치인 김영삼의 복권 문제와 맞물려 부마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5]
[편집] 말년
조립제는 1950년 이후 다트머스 대학에서 계속해서 종신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점차 조립제는 국내의 민주화에 관해 흥미를 잃어갔는데, 그 이유는 조립제가 당시 유행하던 히피 문화에 급속도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립제의 반정부 활동 또한 1970년대 중반 이후 사실상 중단되었다. 10·26 사태 이후 대한민국 학계는 조립제의 귀국을 추진하였지만 당시 조립제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 해변에 착륙 예정인 화성인 비행 접시의 착륙 준비를 지휘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저는 한반도에 관련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1972년 나성 유에프오 착륙 사업 추진 위원회에 몸담기 시작했을 때 부터 오직 우리의 창조주 화성인과의 접선에 있어 왔습니다. 이런 저를 조국의 민주 시민 여러분은 야속하게 생각하시겠지만 결국 이 모든 일련의 사태는 하나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년 내에 밝혀질 것입니다. 우주 원리는 본래 그러한 것이니까요. ”
- —신동아, 1979년 12월 30일
조립제는
년, 자신이 그토록 고대하던 화성인 도래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채, 지병인 치질이 도져서 죽었다. 정권의 탄압을 받은 조립제의 제자들이 조립제 사망 1주기에 맞추어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 사건을 기획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편집] 후손
조립제는 대한게임국 여행 시절 한 여자와 만나 아들 조갑제를 얻었다. 수학자인 아버지와 달리 그는 언론인의 길을 걸었는데,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아버지의 이름에 끝내 먹칠을 하였다.
[편집] 도보시오
[편집] 주석 및 참고 자료
- ↑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 (1938)
- ↑ 조선일보 (1940), 동아일보 (1940)
- ↑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420쪽
- ↑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423쪽
- ↑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424쪽

